영화 <어쩔 수가 없다> 후기_내적 여정의 필요성_책에 빗대어
책 <여성 영성 수업>을 읽으며, 여성 영성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자기 안에 담긴 영성적 요소'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내적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간편하게 해나가는 외부의 것들에 대한 외적 여정과는 다르다. 박정은 소피아 수녀님의 책을 읽으며, 내적 여정은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시작으로, 나만의 내적인, 영적인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온통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삶은 영성적 삶이 아닙니다. 나의 영적 체험이나 기도 체험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17쪽).

어제 감상한 박찬욱 감독 작 <어쩔수가 없다>에는 '가족의 안녕'을 변명 삼아 모진 일을 저지르는 만수(이병헌 배우)가 나온다. 제지 분야에서 25년을 일했다. 사진 속 장면은 영화의 시작 시점인데, 만수가 회사에서 선물받은 장어로 마당에서 가족을 위해 바비큐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곧이어, 체감으론 하루 아침에 구조 조정을 당한다. 실업자가 된 가장은 당장 부동산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이자 빚이 1,000만 원 정도 쌓이고, 아들, 딸의 학원비를 포함한 생활비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영화는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가장 만수가 흐려진 눈으로 저지르는 모든 짓거리를 보여준다. 당장 경제적 어려움과 앞날의 불안을 안고 사는 나에게 박찬욱 감독 영화 중 가장 끔찍하고 처절한 영화가 됐다. 거장의 영화 답게 모든 장면과 과정이 아름답게 표현되었지만, 그게 체감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성 영성 수업>에 따르면, 영적인 지도를 그려나가는 일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주어진 환경을 넘어 문화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영성 수업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17쪽)'이기도 하다. 이 기초를 조금이라도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인식하는 일은 눈을 흐리게 하여, 오직 나에서 나로 세상을 마주보게 하는 일과 같다. 흐린 눈이 맑은 눈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그런 점에서 <어쩔 수가 없다>에 만수를 떠올렸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만수의 만행은 자기에게만 시선을 둔 채, 자신을 위한 행위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나는 순간이 필요할 순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사회문화적 압력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를 표현하지 못한 성범죄 피해 여성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대회 같은 건, 최소한으로, 존재조차 하지 못했던 '내'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면서도 쉬쉬된 존재들에게 말할 장소와 자기를 부여하는 일은 우선되어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영화를 떠올리면서는 과도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한 가정의 가장도 마찬가지다(아주 적으나 여성 가장도 있으니, 남성 가장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을 이유로 또 다른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압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영화에는 구조조정 대상 실업자들이 둥글게 둘러 앉아 교육받는 모습이 나온다. 여성 교육자가 마이크를 댄 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주문을 외우면서 실업자들 자신의 몸, 중요 혈관이 지나가는 귀 아래 부분과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계속 두들이게 한다. 이 장면은 얼핏 보면 자신을 포착하기 위해 몸을 인식하는 자기 인식 수업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데, 실상 진실된 내적 여정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 '자기의 생을 이해하고 깊이를 더해 가는 전 과정(20쪽)'에 대한 고민 없이, '자신이 가진 어떤 조건(외모, 재산, 명성 등)이나 환경에 제한되지 않고 그 너머의 것, 영원, 혹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여정(같은 쪽)'과 같은 것의 상상을 시작하지 않고는 자기 인식을 시작하기란 불가하다.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 적도 없는데, 진정한 자신을 인식하거나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난 만수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상태, 아니, 하나만 아는데 전부 안다는 착각 속에서 행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이미지는 전부 네이버 영화 스틸컷에서 가져왔습니다. #네이버영화
10월 4일 진행된 <여성 영성 수업> 책모임에선 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 10월 5일 영화를 보고 책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책의 저자 박정은 소피아 수녀님은 캘리포니아 예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글로벌 시대에 연결될 수 있을지, 연대할 수 있을지 네트워크를 고민한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는 가장 평범한 가장의 고통을 다루었으며, 그의 안타까운 선택을 소재로 다루었는데, 이 책 또한 가장 평범한(종교적 영성) 분야를 다루면서도,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에 대하여 솔선하고, 독자가 각자의 공간과 일상에서 실천할 것들을 소개한다. 가령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적을 수밖에 없는데, 고유성을 보편성 위에 두는 인격주의, 전복성, 연대성을 강조하며 여성 영성에 대하여 지도한다.

https://www.khan.co.kr/article/201307252059055
👆2013년 박정은 수녀님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왜 어떤 사람은 고통으로 망가지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겪은 뒤 큰사람이 되는 걸까요? 그건 개인적인 영성과 힐링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영성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 그런 공동체에서 나의 눈이 열리고 타인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경향신문 기사 내용 中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들, 책 <여성 영성 수업>에 나온 실천적 방법들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자기의 생을 이해하며 깊이를 더하고,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경험이라는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29쪽)
자크 라캉의 세 가지 원(보로미안 매듭), 즉 서로 연결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37쪽).
- 이와 관련해 합정 부근 인문학 연구 중 자크 라캉 강의를 소개 받았다. (수녀님도 영적 지도를 이어오는 와중에도 라캉을 꾸준히 공부하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자기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깊이를 넓혀 가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http://www.lacaninireland.com/web/ 라캉의 강의와 기타 연구들에 대한 영어 번역물을 무료로 제공하는 웹 사이트(책 175쪽 정보 제공)
인상 깊은 부분으로 61쪽부터 여성주의 인류학자 발레리 프랭클의 <소녀에서 여신으로> 책을 소개하는데, 여성의 성장 및 발달을 달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소녀, 처녀의 시기는 초승달, 공동체의 삶을 사는 보름달, 노년기는 그믐달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직은 거리가 있는 보름달 시기. 개인적으로 노년기를 살필 기회가 없던 것 같다. 자기 인식도 안 된 상태에서 노년기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시기는 누군가를 양육했던 시기를 지나보낸 시기다. 타인의 내적 여정에서 중심을 '자신의 내적 여정'으로 돌려야함이 특히 중요하다. '의미화' 작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생을 놀라워하지 않고 죽음을 놀라워한다. 나도 그렇다.

그에 따르면 텍스트와 관련된 세 개의 세상이 마주 닿는 곳에서 의미가 발생합니다. 텍스트가 쓰인 세상인 '텍스트 배후의 세계the world behind text', 텍스트 속 인물들이 사랑가는 세상인 '텍스트 안의 세계the wold in the text', 독자가 살아가는 세상인 '텍스트 앞의 세계the world in front of the text'가 만나는 것입니다(79쪽)
책모임에서 이를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 만났다는 언급이 있었다. 순간을 위해 책에서 추천된 음악으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https://youtu.be/6LGkAQZaNbs?si=Qkz4q4sMzpZD0O8T>가 있다.
명상지도자 강명희 선생님의 명상 수련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절두산 성지 부근 마리스타 수녀원 공간도 좋다고 했다. 또
예술작품, 자연, 문학이 삶을 해석하도록 돕는다. 그런 면에서 <어쩔 수가 없다>도 바라보는 것으로도 괴로운 만수의 선택을 보며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 의미가 있었던 영화다. 모임에서 언급되었던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 지혜의 원, 경계 정하기, 모임을 평가하기(성과X, 역동O), 공간을 주는 경청자되기, 상대방의 욕구를 파악하는 현실치료, 토대가 되는 '바닥'을 이해하려는 마음 가져가기, 캘리포니아의 다양한 몸들, SE/SP 등 Somatic 기반 치료들, 사실과 위치와 거리 확인하기를 상기해본다.
뒷산에 올라가 들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는 사람, 폭우에 몸을 누인 나무의 안녕을 묻는 사람, 눈이 오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하얀빛을 즐길 줄 아는 사람(91쪽)
자연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지정하는게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감정을 모르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주먹을 맞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171쪽)
감정은 '나를 살리는 빛'으로,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여겼다. 감정과 친해지기 위해 훈련하기. 이름 짓고, 길들이기.
주요 강조 내용을 10월 5일 책모임에서 다룬 이야기 위주로 가져왔습니다.